작성일: 2026-08-13
서론 · 위임장 한 장으로 사라진 임금
매달 일한 대가인 임금이 정작 근로자 본인의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어떨까. 건설 현장을 비롯한 여러 사업장에서는 인력사무소나 소개업자가 근로자를 대신해 임금을 받아 온 관행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본인 계좌 사용 불가’라는 이유로 대리수령 위임장을 쓰게 하고, 실제 돈은 제3자에게 흘러가는 방식이다.
그런데 대법원이 최근 이러한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근로자가 제3자에게 임금 수령을 위임하는 행위는 원칙적으로 무효이며, 사용자가 그 제3자에게 임금을 지급했더라도 근로자 본인에게 다시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금은 반드시 근로자 본인에게 ‘직접’ 지급되어야 한다는 근로기준법의 대원칙을 재확인한 판결이다. 이번 글에서는 임금 직접지급 원칙의 법적 근거와, 이 판결이 사업장 실무에 던지는 메시지를 짚어 본다.
본론 · 근로기준법 제43조와 대법원 판결이 말하는 것
임금 지급의 4대 원칙. 근로기준법 제43조 제1항은 “임금은 통화(通貨)로 직접 근로자에게 그 전액을 지급하여야 한다. 다만, 법령 또는 단체협약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에는 임금의 일부를 공제하거나 통화 이외의 것으로 지급할 수 있다”고 정한다. 같은 조 제2항은 “임금은 매월 1회 이상 일정한 날짜를 정하여 지급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도출되는 것이 이른바 임금 지급의 4대 원칙, 즉 통화지급·직접지급·전액지급·정기지급 원칙이다. 이 가운데 ‘직접지급 원칙’은 임금이 중간에서 가로채이는 것을 막아 근로자와 그 가족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강행규정이다. 그래서 근로자가 스스로 “제3자에게 대신 받게 해 달라”고 동의했더라도, 그 동의 자체가 원칙적으로 효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대법원 2025다209645 판결의 사실관계. 문제가 된 사건에서 근로자들은 인력사무소를 통해 건설회사와 일당 19만 원에 근로계약을 맺고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거푸집 해체·설치 작업을 했다. 이들은 ‘본인 계좌 사용 불가’를 이유로 인력사무소 관계자에게 임금을 대신 받도록 위임한다는 ‘임금 대리수령 확인서(위임장)’를 작성해 회사에 제출했다. 회사는 그 서류를 믿고 인력사무소 측에 임금을 지급했지만, 정작 근로자들에게는 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판결의 핵심 법리. 대법원은 근로자가 제3자에게 임금 수령을 위임하거나 대리하게 하는 법률행위는 직접지급 원칙에 반하여 원칙적으로 무효라고 판단했다. 다만 근로자가 직접 수령할 수 없는 상당한 이유가 있어 단순한 ‘사자(使者)’를 통해 임금을 받는 경우처럼 극히 예외적인 상황은 열어 두었으나, 그 예외 요건은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이 사건의 수령인은 “사회통념상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것과 동일시할 수 있는 사람”이나 “임금을 그대로 전달할 것이 확실한 사람”으로 보기 어렵다고 봤다. 결국 회사가 그 제3자에게 임금을 지급했더라도 직접지급 원칙 위반으로 무효이므로, 회사는 근로자들에게 임금을 다시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어디까지가 허용되는 예외인가. 그렇다면 제3자가 임금을 대신 받는 것이 모두 금지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우선 근로기준법 제43조 제1항 단서는 “법령 또는 단체협약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예외로 인정한다. 선원법처럼 별도 법령이 대리수령을 허용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 하나 실무상 중요한 것이 ‘대리인’과 ‘사자(使者)’의 구분이다. 자신의 의사로 임금을 수령해 처분까지 하는 대리인에게 지급하는 것은 직접지급 원칙 위반이지만, 근로자의 심부름꾼처럼 임금을 그대로 전달하기만 하는 사자에게 건네는 것은 사실상 본인에게 지급한 것과 같다고 볼 여지가 있다. 예컨대 근로자가 입원 중이어서 배우자가 통장을 들고 와 대신 받아 그대로 전달하는 경우가 후자에 가깝다. 다만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그 예외를 매우 좁게 보아, 수령인이 “임금을 그대로 전달할 것이 확실한 사람”인지 엄격히 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력사무소나 소개업자처럼 자기 채권 회수·수수료 정산 등 독자적 이해관계를 가진 제3자는 이 예외에 해당하기 어렵다.
실무적 영향 — ‘이중지급’의 위험. 이 판결의 파장은 크다. 사업주가 근로자로부터 위임장이나 대리수령 확인서를 받아 두었더라도, 그 서류만으로는 임금 지급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제3자에게 이미 돈을 주었더라도 근로자에게 또 한 번 지급해야 하는 ‘이중지급’의 위험을 사업주가 고스란히 떠안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직접지급 원칙 위반은 형사처벌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근로기준법 제109조 제1항은 제43조를 위반한 자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으며, 같은 조 제2항에 따라 이는 피해자의 명시적 의사에 반해서는 공소를 제기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에 해당한다. 건설업처럼 인력사무소를 거치는 도급·소개 구조가 많은 업종일수록, 관행적으로 이어져 온 대리수령 방식을 전면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결론 · 임금은 근로자의 손으로
이번 대법원 판결은 새로운 규제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근로기준법 제43조에 이미 담긴 직접지급 원칙을 현장의 관행에 맞서 다시 확인한 것이다. 핵심은 분명하다. 임금은 근로자 본인에게, 본인 명의 계좌로 직접 지급되어야 하며, 위임장 한 장으로 제3자에게 대신 지급하는 방식은 원칙적으로 효력이 없다는 점이다.
사업주라면 임금은 반드시 근로자 본인 명의 계좌로 지급하고, 대리수령 확인서에 기대어 제3자에게 지급하는 관행을 정리해야 한다. 부득이하게 본인 수령이 어려운 사정이 있다면 그 사유와 전달 경위를 엄격히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겨 두는 것이 안전하다. 근로자라면 임금이 본인 계좌로 정상 입금되는지 매월 확인하고, 대리수령을 강요받았다면 직접지급 원칙에 따라 사용자에게 정당한 지급을 요구할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임금은 근로자의 생활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이며, 그것이 반드시 근로자의 손에 닿아야 한다는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